프로야구 카운트아웃과 함께 찾아온 계절의 묵언     


가을 야구의 끝자락, 나의 조용한 동안거(冬安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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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한 해를 마감하는 은밀한 의식

봄날이 아닌데도 가을이 깊어갈 즈음 모란을 떠올릴 때가 있다. 고운 꽃의 화려한 자태에 깃든 다정함 때문이 아니다. 가슴 뜨겁게 응원하는 프랜차이즈 프로야구팀이 코리안 시리즈에 탈락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나의 일 년은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프로야구의 성적표를 따라 흘러간다. 시인 김영랑이 모란이 지고 나면 한 해를 다 보내고 섭섭해했듯이, 나의 계절 역시 야구가 끝나는 지점에서 사실상 마침표를 찍는다. 플레이오프나 코리안 시리즈에서 탈락하는 날, 나에게 남은 한 해는 더 이상 흘러갈 마음을 잃는다.

어떠한 종교도 가지지 않은 나지만, 그날 이후로 스스로를 내년 봄 시즌 오픈 전까지 불교의식과 같은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다. 연말연시의 부산스러운 모임과 어수선한 술자리를 동안거라는 핑계(?)로 사양한 채, 오롯이 나만의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프로야구 카운트아웃과 함께 찾아온 계절의 묵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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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맨십 뒤에 숨은 아쉬운 가슴앓이

사실 나는 대범하게 승부를 즐기는 편이 못 된다. 셰익스피어가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이라는 단어를 겉으로는 온화하게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리 태연하지는 못하다.

경기가 끝나고 전광판의 불빛이 꺼지면, 패배가 남긴 짙은 잔상이 마음에 길게 그림자를 드린다. 그리고 혼자만의 열병과도 같은 가슴앓이를 겪어내야만 한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두고 한낱 ‘지나친 집착’이라 치부하곤 하지만, 나로서는 프로야구 마니아의 숙명이라고 거창하게 항변하고 싶다.           

아쉬운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글픈 침묵의 시간은 결코 절망의 늪은 아니다. 지금은 비록, 쓰라린 패배의 기억과 아쉬움을 지새우는 시간이지만 내년을 향한 간절한 열망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다시 타오를 소중한 첫 투구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김영랑의 詩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마지막 시구를 패러디해 본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봄날의 페넌트레이스 오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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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봄날의 페넌트레이스 오픈을…

詩, 모란이 피기까지는

作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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