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당들의 오만함과 내 술잔의 취향


강권하는 술좌석의 유감

독유당(獨遊堂) 혼놀이야기 모음

시골 마을의 절기 이벤트

시골집에 자주 머물다 보니 절기(節氣)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골에서는 초복, 중복, 말복이 중요한 마을 이벤트가 되어 있음을 느낀다. 절기는 무더위를 이기는 보양식과 단조로운(?) 일상의 갈증을 해소하는 마을의 잔칫날인 것이다.

지난 초복(初伏)에는 마을 사람 이십여 분과 읍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마을회관을 돌아와 신명 나는 윷놀이 판과 함께 단란한 술자리가 펼쳐졌었다. 엊그제는 중복(中伏)이었다. 아침 일찍 마을 회관 확성기에는 중복 이벤트인 점심 식사 공지사항으로 아침 단잠을 깼다.

얼마 후 이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나도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다.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새로운 얼굴을 보태고자 했던 이장님의 고마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읍내에 계신 문중의 사촌 형님 내외분과 먼저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서두르는 사촌 형님

11시에 읍내에서 뵙기로 했던 사촌 형님은 아침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택시를 타고 시골집 입구까지 나를 데리러 오셨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습관으로 11시까지 기다리기가 지루하셨던 모양인데, 마음 서두르는 형님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린시절, 평소와는 다르게 소풍날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만드는 부엌을 드나들던 옛생각이 나서 말이다.

내년이면 80세를 맞게 되는 사촌 형님은, 친할아버지 밑으로 남아계신 친척 어른 중 가장 큰 형님이시다. 문중의 크고 작은 일을 주관하기에 매년 마주하는 분이기도 하다.

1차로 뜨끈한 삼계탕을 먹은 뒤, 동석한 형수님과 커피 타임을 위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애주가이신 형님은 모처럼 만난 아우와의 시간을 커피보다는 술자리로 이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술!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는 형수님이기에 커피 타임이 끝난 후, 형수님을 먼저 배웅해드렸다.

주당들의 오만함과 내 술잔의 취향 1

소주병과 맥주잔 사이의 대화

드디어(?) 대낮이지만 형님과 3차 술좌석이 만들어졌다. 소주만을 마시는 형님과 맥주만을 마시는 나의 취향에 맞게 술병과 술잔이 놓였다. 커피를 마실 때의 밋밋함과는 달리, 형님의 얼굴에는 화기애애한 미소가 번졌고 반갑게 첫 잔을 기울였다.

봄날에 뵙고 다시 마주한 형님은 그새 청력이 많이 어두워지신 듯했다. 한두 번의 말로는 온전한 대화가 닿지 않아 동문서답이 이어졌고, 같은 말을 반복하느라 힘이 들었다. 나누는 이야기 또한 지나온 옛 시절과 집안 어른들에 대한 회상인데, 매번 술좌석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였기에 지루함이 느껴졌다.

정치와 종교를 제외한 요즘의 시사 이야기도 좀 하고, 대중문화 이야기도 좀 하면 좋겠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님만의 내러티브 대화 속에 술자리는 조금씩 아득해졌고 술맛 또한 옅어져 갔다.

그 순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맥주라도를 즐기는 편이니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이 지루함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라고

주당들의 오만함과 내 술잔의 취향 2

나의 술 취향

나는 술을 좋아한다. 다만 잔을 무자비하게 비워내는 두주불사(斗酒不辭) 타입은 아니다. 그저 맥주의 청량함을 아끼는 편음가일 뿐이다.

때에 따라 와인이나 위스키, 가끔은 상황에 맞춰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지만 소주만큼은 아무리 친해지려 해도 입에 맞지 않는다. 소주병 뚜껑을 따는 순간 퍼지는 알코올 향만으로도 머리가 아득해지곤 한다.

처음엔 소주의 알코올도수 때문인가 싶었지만, 비슷한 도수의 와인이나 일본 사케는 거부감 없이 마시는 것을 보면 소주 특유의 풍미가 나의 미각과 결이 맞지 않는 것 같다.

풍경이 되는 술자리를 위하여

살다 보면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사람과 합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가까이는 나의 아내가 그러하다. 가끔은 아내와 호젓하게 술잔을 마주하는 낭만을 꿈꾸기도 하지만,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왜 술을 마시지 못할까’ 하는 부질없는 의문이 스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주를 떠올린다. 술을 좋아함에도 소주만큼은 마시지 못하는 나의 취향을 되짚어보면, 술을 멀리하는 아내의 마음이 곧바로 헤아려져 절대로 잔을 권하지 않게 된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인상적으로 떠오른다.

술 마시는 것을 세상의 당연한 상식으로 여기는 오만함은
마시지 않는 이의 눈에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이다.

나는 술을 즐기는 편이지만 이 말에는 열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어진다. 술자리는 결코 타인에게 취기를 강요하거나, 곤혹스러움을 주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혐오감 없는 마음으로 강권함이 없는 자유로움이 흐를 때, 비로소 그 술자리는 편안하고 낭만적적인 풍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독유당(獨遊堂) 혼놀이야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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