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그늘이 무너지다


익명의 대중성에 대하여

독유당(獨遊堂) 혼놀이야기 모음

고요라는 소중한 섬

시골집에 머무르는 가장 큰 장점은 익명의 대중성이 보장되는 아늑함이었다. 시골동네는 선친의 고향이기에 나를 기억하는 이가 드문 적막함이 마음에 들었다. 동네의 무관심과 고요한 자유가 좋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문을 열고 마실을 나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마을 속 외딴 섬. 가끔은 밀려드는 적막에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워질 때도 있었으나, 외로움은 도리어 읽고 쓰는 삶에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집중이 흐트러질 때면 낯선 유럽의 이방인처럼 오후의 여유로운 시에스타를 누렸고, 석양이 지고 어둠을 찾아들면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서늘한 고요를 맞아들였다.

다정함이 불러온 조용한 균열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나를 자유롭게 감싸 안던 익명의 울타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모두 나의 사소하고도 섣부른 다정함(?)이 불러온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읍내로 나가 외식을 하자고 건넨 나의 제안, 마당 평상에서 맥주 한잔 나누자며 초대한 나의 손길, 마을 분들이 모일 때면 어색함을 떨치고자 휴대폰으로 찰나의 순간을 담아 이장님께 카카오톡으로 보내던 나의 순수한 마음들.

엊그제는 마을 회관에서 동네 두 어르신의 구순과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가 열렸다. 두 분 모두 모르는 어르신이었다. 근래 들어 몇몇 이웃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 부쩍 잦았던 터라 이번 잔치에는 참석하지 않고 집에 홀로 머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이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잔치에 와서 스냅사진도 좀 찍어주고, 다 함께 축하해 주시길 바라오.”라는 순박한 당부가 있었다. 엉겁결에 “네”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뿔사” 라는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동네 전담 사진사’라는 역할이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익명의 그늘이 무너지다 1

어울리지 못하는 자유

마을 회관 잔치에 참석했다. 처음 만나는 어르신들께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부지런히 휴대폰 사진을 찍었다. 깊은 낯가림을 가진 내게 건네지는 술잔은 서먹하기 그지없었고, 푸짐하게 차려진 잔치 음식들은 소식 체질에다 편식 체질인 내게 별다른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그동안 이웃들과 얼굴을 익혀갈수록 술자리는 늘어갔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내가 사랑하는 술자리의 온도가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이 자리가 어서 마무리되고, 익숙한 내 방으로 돌아가 호젓하게 홀로 잔을 비우고 싶은 간절함만이 가슴을 채웠다.

스러지는 마음의 평화

식사가 끝나고 윷판이 벌어질 조짐이 보이자, 나는 도망치듯 슬그머니 마을 회관을 빠져나왔다. 마음 한구석에 찝찝한 여운을 남긴 채 돌아오는 길, 지난 2년 동안 나홀로 시골집에서 누려온 평화롭고 조용한 나날들이 스러지는 듯했다.

오늘은 새삼스럽게 타인과의 거리가 보장되던 도시의 아파트가 그리워진다. 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과의 거리를 자꾸만 멀리하려는 걸까. 사회적 인간성은 퇴색하고 점점 개인주의로 흐르는 나의 모습. 홀로 고민하는 내게 한 지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전했다.

“그건 늙어간다는 의미야.”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마 ‘격한 공감’ 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기에는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였기에 말이다.

독유당(獨遊堂) 혼놀이야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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