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기억
1.친구의 서글픈 커피값
지난 젊은 시절, 시골에서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의 이야기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 훈련 시작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았기에 근처 다방엘 들어갔다. 마침 친구가 다방 한쪽 구석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합석을 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친구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영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다. 대화를 시작해도 초점은 자꾸만 다른 곳을 주시하고, 뭔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주문한 내 커피가 막 탁자에 놓이는 순간 친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500원짜리 동전을 내 앞에 건네고는 커피값 계산할 때, 자신의 커피값도 함께 지불해달라는 말과 함께 총총걸음으로 다방 문을 나선다.
그때서야 상황판단이 이루어졌다. 당시 시골 커피값이 450원인가 했던 기억인데, 친구 수중엔 500원짜리 동전 하나 밖에 없었나 보다. 혹시라도 자신이 두 잔의 커피값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염려했던 것 같다. 평소 폼생폼사였던 친구는 이런 거북함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커피값을 미리 놓고서 부랴부랴 자리를 뜬 것이다. 가난한 친구의 애처로운 뒷모습이었다.

2.법정스님과 음악실
한때 법정스님이 광주에 오면 들렀다던 고전 음악실이 있었다. 나도 가끔은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고전 음악실이었다.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날씨가 쌀쌀하여 온기를 찾아 나 홀로 고전 음악실에 들어섰다. 용돈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이기에 평소엔 가장 싼 일반 커피를 주로 마셨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색다른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메뉴를 보아하니 발음도 어려운 커피가 있어 그 커피를 주문하게 되었다.
잠시 후 커피가 나오는 데, 여자 종업원이 아닌 남자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뿐만이 아니라 플라스크와 알코올램프까지 가져왔다. 내가 주문한 커피는 손님 탁자에서 알코올램프로 플라스크를 데워 직접 원두커피로 만들어주는 메뉴였던 것이다.
아르바이트인 듯한 청년의 서툰 손놀림으로 조립이 되어가던 중 플라스크가 깨지고 말았다. 조립하는 청년의 손목 힘이 너무 강했던 모양이었다. 서로의 놀란 눈빛이 교환되고 청년은 당황해 했다. 책임자가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가져오겠다고 했다. 내가 너무 번거로움을 주었다는 생각에 사양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중을 듣게 될 청년의 모습이 어른거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마음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커피를 마시고 왔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날 그 청년의 일당은 제대로 받았을까? ㅠ.ㅠ

3.커피가 있는 풍경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커피가 마음에 드는 것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다.
커피숍에 가면 탁 트인 창을 바라보고 마시는 긴 테이블이 있다. 그 탁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연인들의 뒷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남자의 쩍벌어진 듬직한 어깨와 단정한 숙녀의 뒷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 친구들끼리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평화롭다.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는 싱글의 모습도 보기 좋다. 연인이든 친구든 싱글이든 행복한 모습들로만 비춰진다.
모두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켠에는 또 다른 찻집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가 있다. 나훈아가 불렀던 노래 ‘찻집의 고독’과 같은 분위기다. 흠모하는 사람에게 어렵사리 약속을 잡고 행여나 올까 말까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을 노래한 가사인 데 언제 들어도 찻집의 고독이 느껴지는 노래다.
그 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길처럼 감미로웠다
약속시간 흘러갔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아, 사랑이란 이렇게도
애가 타도록 괴로운 것이라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가슴 조이며 기다려봐요.
예전의 다방이나 지금의 커피숍은 우리 모두의 문화공간이었다. 하지만 현대화되고 고급스러운 커피숍에 밀려 예스런 다방은 한적한 변두리에서 갈 곳 없는 몇몇 노인분들이 차 한 잔 주문하고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는 듯 하다.
아주 오래전, TV로 소개되었던 대구에 있는 고전 음악다방 ‘국향’이 떠오른다. 그 다방의 주인이자 DJ였던 어르신은 고희를 훨씬 넘은 지긋한 연세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가끔씩 친지와 지인들을 초청해 지하다방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 정도였다.
손님이 없을 때에는 음악을 켜놓고 지긋하게 두 눈 감고 감상하는 모습이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아직 영업을 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음악다방이다.
현대 사회의 개방이 가속화되고 신파적인 찻집의 고독이란 한갓 유행가 가사가 되었을 지라도, 사랑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표현의 방법이 바뀌어 가고 있을 뿐이다. 그저 즐겁고 행복한 모습들로만 비치는 지금의 커피숍 한쪽 구석에서도, 싸늘하게 식어가는 커피 한 잔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곁에 두고 찻집을 고독을 느끼는 청춘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애탔던 기다림이 결실을 맺었을 때, 가슴 조이며 기다렸던 찻집의 고독과 사랑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소망해 본다.
김영배 수필집
<마이너리그에도 커피 향은 흐른다> 에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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