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때를 벗기는 낭만적 비움


시골집 부엌정리와 소유를 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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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한 시간들이 쌓이던 날들

한때 신형 가전제품이나 일상용품을 사면 구형 제품을 그냥 버리기 아까웠다. 그럴 때는 시골집 뒷마당과 창고를 이용했다. 비단 나뿐 아니라 누나와 동생들도 그랬다. 어머니는 점점 차오르는 창고의 폐기물들을 바라보며, 왜 좀 더 사용하지 않느냐고 과소비의 습관을 탓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결혼한 조카들마저 아깝다고 버리지 못하는 잉여 물품이 생기면 시골 할머니 창고로 가져왔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30년 전에 세상을 뜬 큰누님의 혼수품이었던 장롱까지 뒷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홀가분한 비움을 향한 움직임

2년 전 어머니께서 북망산 너머 고요한 길을 떠나셨다. 그 쓸쓸함을 딛고 드디어 창고정리 기회가 찾아왔다. 어머니 유품을 틈틈이 정리했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던 살림살이들을 조금씩 버려나갔다.

세월의 때가 깊게 배인 장롱과 수명을 다한 가전제품은 읍사무소에 스티커를 발급받아 내놓았고, 분해가 가능한 소품들은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아 비워냈다. 지난해는 안방의 정리를 마쳤다. 하지만 매일 손길이 닿는 부엌의 요리기구와 식기들은 선뜻 내다 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두고 있었다.

시간의 때를 벗기는 낭만적 비움 1
빔프로젝트 영화도 감상할 수 있는 현재의 안방

시선 밖으로 몰아낸 차선책

남자인 내가 부엌살림을 정리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 누나가 얹어놓고 간 그릇들이나 서울 누나와 동생들이 마련한 살림들이었기에, 그들의 서운함 섞인 원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차선책은 완전히 버리기보다 마당 뒤편에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크고 작은 냄비와 접시들은 선반 위에 차곡차곡 놓은 뒤 비닐 커튼으로 가려두었고, 수많은 플라스틱 용기들은 커다란 상자 속에 모아둠으로써 언제든지 사용가능하게 하였다.

당장 눈에 뜨지 않으니 마음속 살림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치워진 자리에 남겨진 허전함과 얼룩진 장판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결국, 홀린 듯 온라인 쇼핑몰에서 지름신과 조우했고, 택배기사는 매일 시골집 대문을 드나들었다.

아내와 시골 누나의 손길을 빌려 냉장고를 들어내고 새 장판을 깔아 두니, 시간의 때가 쌓인 낡은 부엌이 단정하고 말끔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간의 때를 벗기는 낭만적 비움 2
버리지 못하는 미련은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취향으로 배치한 아늑한 공간

조금 더 그윽한 분위기를 내고자 벽 한쪽은 내 취향에 맞는 커피 머신과 술병들을 수집품처럼 정렬했다. 휑하던 벽면에는 나 홀로 시골생활에 어울리는 애드워드 호퍼의 고독한 그림 한 점과, 고교 졸업 직후 박인환의 시를 그려(?) 넣었던 낡은 판넬을 청춘의 추억처럼 걸어두었다.

부엌에서도 프로야구의 열기를 누릴 수 있도록 창문 위쪽에 조그만 TV를 설치했고, 혼밥을 하는 썰렁한 식탁 앞에는 십만 원에 산 그림을 걸었다. 이 그림은 딸아이가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그린 습작용 그림이었다.

혼자서 물건을 옮기고 설치하며 다시 바꾸는 일에 온전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단장을 마치고 나니, 이제는 오래된 벽지가 눈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배를 하려면 안방과 뒷방, 마루와 부엌의 모든 물건들을 임시로 옮겨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무거웠다. 아무래도 도배는 당분간 보류하는 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올 것 같다.

시간의 때를 벗기는 낭만적 비움 3
내 취향으로 바꾼 시골집 부엌

소유를 줄이면 늘어나는 자유의 범위

문득 법정 스님이 남기신 “소유를 줄이면 자유가 늘어난다”라는 잠언이 마음 깊은 곳을 울린다.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나의 안분지족의 삶을 의연하게 이어나가려면, 소유라는 굴레에 대한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주변을 조용히 둘러본다.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인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채, 물건들이 비워진 자리에 스며드는 고요하고 한가로운 자유를 가만히 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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