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그 사랑의 그림자
미라보 다리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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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다리에서 바라본 에펠탑과 자유여신상 |
파리의 아침, 센 강변을 거닐며
파리의 아침은 늘 설렘으로 시작된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금 이른 시각, 센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뜻밖에 포근한 날씨 덕분에 에펠탑을 바라보며 센 강변을 산책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이다.
어제는 다리 통증 때문에 포기했던 미라보 다리에 드디어 도착했다.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다리는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운치가 없을 수도 있지만, 저 멀리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다. 센 강을 바라보며 시집 대신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검색으로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조용히 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 새겨두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그 사랑의 그림자
미라보 다리에서 시를 읊다 보니, 문득 아폴리네르가 그토록 사랑했던 마리 로랑생이 떠오른다. 내 젊은 시절에는 아폴리네르보다 마리 로랑생에게 더 큰 매력을 느꼈었다.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 서사'의 이름도 바로 그녀에게서 따왔다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갔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라는 시구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원래 문장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번역가들의 말에 따르면, 죽음보다 더 불행한 것은 망각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나는 왠지 '잊혀진 여인'이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마리 로랑생은 잊혀진 여인이 아니라 스스로 잊혀지기를 선택한 여인처럼 느껴진다. 사랑에는 에티켓과 상식이 없다지만,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도난 사건 당시 로랑생이 보여준 행동은 그녀의 진심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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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미라보 다리 |
잊혀진다는 것, 그리고 기억의 의미
미라보 다리에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지하도를 바라본다. 갑자기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떠오른다. 그곳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장소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지금은 누군가에게 잊혀진 여인이 되었을까?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생각난다. '지휘자가 사랑한 지휘자'로 불리지만, 그는 자신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극히 제한된 연주 활동만을 하고 대중을 피해 은둔 생활을 했다.
몇 해 전에는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나왔었다. 이 제목은 뤼케르트의 시에 말러가 곡을 붙인 가곡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말러 교향곡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마치 이 가곡을 연주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잊혀지고'와 '잊히고', 그 미묘한 차이도 생각해 본다. '잊혀지고'는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반면, '잊히고'는 자연스럽고 애잔한 느낌이 든다. 잊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반드시 불행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언젠가 저 또한 세상에서 잊혀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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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센강 |
파리 여행 정보 요약
①미라보 다리
특징: 철골 구조로 만들어진 다리로, 센 강과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뷰를 볼 수 있다.
교통: 메트로 10호선 Javel-André Citroën 역 또는 9호선 Mirabeau 역에서 하차 후 도보 이동
입장료: 무료
②다이애나 추모 공간
특징: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하도 인근에 조성된 추모 공간
교통: 메트로 9호선 Alma-Marceau 역에서 하차 후 도보 이동
입장료: 무료
역사적 인물 요약
①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미술평론가. <미라보 다리>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20세기 초반 문학과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②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아폴리네르와 연인 관계였으며, 여성적인 섬세한 색채와 우아한 분위기의 초상화와 정물화 등을 주로 그렸다.
③박인환:
한국의 시인. <목마와 숙녀>로 유명하며, 서울 명동에서 '마리 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했다.
④다이애나 스펜서 (Diana Spencer):
영국의 왕세자비.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⑤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은둔 생활을 하며 극히 제한된 공연만 진행했다.
⑥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오스트리아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교향곡과 가곡 등을 작곡했으며, 현대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