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와 양귀자, 그리고 김정호가 노래한 ‘인생’
역사 속에 묻힌 이름을 마주하다
아내와 모처럼 한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요즘 장안의 화제라는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였다. 제목만 듣고는 궁중의 비사를 다룬 내시의 이야기 같지만, 단종애사(端宗哀史)의 배경인 사극이었다.
비운의 왕 단종이야 익히 알려진 슬픔이지만, 그 곁을 지킨 ‘엄흥도’라는 인물은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낯선 이름이었다. 영화를 마주하기 전날, 유튜브를 통해 미리 채워둔 지적 호기심 덕분일까. 화면 속 엄흥도의 충심이 영화 마지막엔 애달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인생은 초로(草露), 연산군의 탄식
영화를 보는 중에 단종의 슬픈 이야기 밖으로 뜻밖에 연산군의 이야기가 오버랩 되었다. 특히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연산군의 마지막 詩 한 수가 떠올랐다.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아서
만날 일이 많지 않더이다.“
한순간의 혁명으로 무너져 내렸으나,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시를 남겼다는 연산군.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그조차 말년에는 인생을 풀잎 끝에 맺힌 위태로운 이슬(草露)에 비유했다. 덧없는 생을 후회했던 왕의 탄식이 영화의 여운과 뒤섞여,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고양이 쿵이의 침묵, 묘생(苗生)을 사색하다
아내가 잠이 든 시각. 캔맥주 한 잔을 들어 초점 없는 시선으로 TV화면을 바라보는데, 딸아이가 기르는 고양이가 거실을 어슬렁거린다. ‘쿵’ 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다.
쿵이는 가끔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깊은 침묵을 즐기곤 한다. 그 고요한 뒷모습은 마치 인간이 고독한 사색에 잠긴 듯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사진을 찍기도 한다. 하지만 셔터 소리가 쿵이의 사색을 방해한 탓일까. 자세를 풀고 도도하게 딸아이의 방으로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가끔 쿵이의 사색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내는 묻는다.
“쿵아,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니?“
그러면 나는 짐짓 철학자라도 된 양 대신 대답한다.
“아마도 ‘묘생(苗生)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 중이겠지.“

책장 속의 인생, 그리고 바람 따라가는 인생
‘인생’이라는 두 글자를 입안에서 굴려보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김정호의 애절한 노래 <인생>, 위화의 묵직한 소설 <인생>, 양귀자의 날카로운 소설 <모순>이다. 특히 위화와 양귀자의 소설은 내 영혼의 안식처이자, 흔히 말하는 나의 최애 인생 책이라 할 만하다.
오늘 마주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먹먹함, 연산군의 쓸쓸한 詩, 그리고 책장에 꽂힌 명작들을 생각한다. 조용히 책장에서 <인생>과 <모순>을 꺼내 사진을 찍어본다.
맥주를 들이키며, 김정호의 노래를 나직이 허밍으로 흘려본다. 왕의 삶도, 고양이의 삶도, 나의 삶도 결국은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닐까.
“아, 인생, 인생이란… 바람 따라 가는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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