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 시골집 라면 끓이는 풍경
데면데면한 나의 라면 취향
평소 라면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가끔 간식용으로 먹기는 하지만 따뜻한 밥이 있을 때는 라면을 먹지 않는다. 간식이 흔치 않던 유년 시절엔 허기를 때우는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먹던 라면이었다. 대신 아무리 시장기를 느껴도 한 개 이상은 먹지 않았다. 라면 특유의 기름진 느끼한 맛이 나의 입맛을 앗아가서였다.
매운 것을 먹으면 엄동설한에도 땀을 뻘뻘 흘리는 나의 음식 취향에 신라면은 불청객이다. 신라면 이후 혀를 찌르는 비슷한 매운 라면이 나오고부터는 라면 세계와 더 멀어졌다. 설령 눈부신 만년설이 덮인 스위스 융프라우의 정상이라 해도, 그 매운 라면의 유혹은 나를 흔들지 못하리라 여겨진다.
라면을 부르는 찬밥
하지만 일부러 라면을 찾을 때가 있다. 식은 밥이 생길 때이다. 이때 라면은 식은 밥의 보조가 아니라 메인이 되고, 오히려 식은 밥이 라면의 맛을 돋우는 보조제가 된다. 언젠가 “라면은 찬밥과 먹어야 제맛”이라던 작고한 앙드레 김의 인터뷰를 읽으며, 나 홀로 격하게 공감했던 적도 있었다.
찬밥이 없어도 라면이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이 또 있다. 시골집에 머무를 때이다. 특히 시골집 마당에 비가 내릴 때인데, 빗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면 본능처럼 라면 물을 올리게 된다. 언젠가 시골집 마루에 걸터앉아 라면을 끓여 먹던 나를 보며, 생전의 모친은 이렇게 한 마디 하셨다.
“좋은 음식 다 두고 하필 라면이냐”며 혀를 차셨다. 모친의 눈에는 자식의 라면 먹는 모습이 퍽 안쓰럽고 빈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부모세대에게는 라면이란, 쌀이 없어 끼니를 잇던 빈곤의 상징이었을 테니까.

빗소리가 부르는 라면
오늘은 전국적으로 꽃샘추위 속에 봄비가 내린다. 마침 밥통의 밥은 반 그릇 정도이다. 점심 메뉴는 고민할 것 없이 라면이다. 우산을 쓰고 마당 텃밭으로 나가 겨울을 견딘 마지막 대파를 뽑았다. 싱그러운 흙내음이 풍기는 대파를 수돗물에 씻고, 물기를 뺀 후 송송송 썰었다.
얼마 전 라면용으로 산 노란 냄비에 물을 넣고, 방금 다듬은 대파를 듬뿍 넣는다. 알싸한 향기가 국물에 깊게 배어들 때쯤, 다시 라면 수프를 넣고 라면을 끓인다.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파의 향이 수프의 향과 어우러져 나의 식욕을 돋운다.
쥐코밥상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구수한 라면이 곁들여진다. 타인의 눈에는 ‘왕후의 밥 걸인의 찬’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나에겐 최고의 요리임에 틀림없다. 더우기 시골 마당에는 차가운 바람이지만 봄비도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고양이와 나누는 별 세 개의 소확행
빗소리와 추억을 반찬 삼아 라면을 먹다 보니 어느새 바닥이 보인다. 남은 국물까지 들이켜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른다. 마당 한구석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길고양이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반려묘 두 마리를 기르는 딸아이는 고양이에게 되도록 라면을 먹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양이에게는 짜고 맵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고 배고픈 생명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수돗물에 한 번 헹궈 길고양이 그릇에 담는다. 허기를 달랠 길고양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비 오는 날, 시골집에서 끓여낸 라면 한 그릇. 감히 미슐랭 별 셋(3스타)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맛의 향연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시골집 감성의 라면이 선사하는 나 홀로 소확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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